조선의 화가, 지우재(之又齋) 정수영(鄭遂榮)

지우재 정수영은 누구인가요?

지우재 정수영(1743년-1831년) 은 정조 시절에 활약했던 화가입니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던 정인지의 후손이며, 실학자, 지리학자였던 정상기의 증손자입니다.

선비 화가로서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지리학의 명문이었던 집안의 전통을 따라 경치 좋은 곳을 여행하며 그림을 그리는 등, 시와 글, 그림에 몰두하며 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현장에서 유탄(버드나무 숯)으로 스케치한 위에 수묵담채를 가한 화법을 구사한 사생 화가입니다. 조선 후기 회화의 새로운 경향이었던 남종화풍과 한국적인 진경산수화로 그린 산수화, 인물, 물고기 등 여러 소재의 그림이 남아있습니다. 특히 해산첩에 들어있는 금강전경도, 한.임강명승도권에 들어있는 신륵사와 신륵사 동대에서는 사실적인 화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국 전통 회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부감 시점, 즉 하늘에서 내려다 본듯한 다시점으로 그려서 다소 어색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의 그림에 나타난 사실적인 장소들은 마치 사진을 보는 듯합니다.

그러면서도 지우재 정수영은 전통적인 화법에 구애받지 않는 독특한 그림 그리기를 시도했습니다. 그의 강한 개성미는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평가 되고 있습니다.

추경산수도(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추경산수도
바위산은 대담하며 자유스러운 필치로 처리하고, 나무와 물이 흐르는 계곡은 정형 산수화 화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화법의 조화를 끌어낸 것은 지우재 정수영 화가의 특징입니다. 왼쪽에 보이는 바위산은 마치 아름다운 여인의 옆얼굴을 연상하게 합니다.

머리 장식을 가득히 하고, 오똑한 코와 긴 속눈썹을 가진 여인이 맞은편 산, 눈물을 흘리며 어딘가를 그리움으로 바라보는 형상으로 보이네요. 그래서 바위산은 대담한 필법으로 그렸지만 여성적인 고요함이 있습니다.

분방한 바위산은 그 고요함으로 인해, 자연스러운 구부러짐으로 바위산 아래를 채우고 있는 노송, 그 옆에 서있는 각기 다른 나무 종류와 계곡, 흐르는 물, 그 곁의 누각과 서로 차분하게 녹아들어 가고 있는 듯 합니다. 가을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그리움의 계절인 것 같군요.

청룡담
청룡담 (금강산 화첩에 들어있는 작품) . 동원 미술관 소장이었으나 소유주 이홍근씨의 기증으로 현재는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

청룡담(靑龍潭)
청룡담은 금강산의 내금강, 만폭동의 금강대를 지나, 아래 개울 큰 바위 밑에 있습니다. 이 그림은 대각으로 암반을 타고 흐르는 빠른 물줄기를 구심점으로 삼았는데, 제각기 다른 암반의 모습을 보니, 금강산의 비경을 화폭에 다 담아내지 못하는 화가의 안타까움이 엿보이는 듯합니다.

분설담
분설담 (금강산 화첩에 들어있는 작품). 동원 미술관 소장이었으나 소유주 이홍근씨의 기증으로 현재는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

분설담
분설담은 금강산 만폭동에 있는 못으로, 분설폭포 아래에 있다고 합니다. 물이 폭포에서 떨어지면서 물안개를 흩뿌리는 모습이 마치 눈이 내리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네요. 이 그림 역시 화폭의 중앙을 대각선으로 흐르고 있는 물줄기의 기세가 강하게 보입니다.

오른쪽 위에 있는 바위는 귀가 큰 고승을 연상케 합니다. 왼쪽에 있는 바위는 포효하는 사람의 입 모양을 닮았고요. 이 그림에서는 남성상이 보입니다. 작가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요…. 화폭에 담을 수 없었던 물살의 소리를 어떻게 표현할까, 고심했을 것 같습니다. 양쪽의 바위는 모두 입을 크게 열고 있습니다. 물줄기 모양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바위들로 인해 이미 화폭 위에서는 기세 좋은 물줄기의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바위 틈새에 서있는 나무 두 그루가 아니었다면, 마치 현대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했을 것입니다. 산만하게 보이기조차 한 이 화법은 당시의 산수화에서는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리학 명문 집안에서 태어난 지우재 정수영 선생은 오히려 사실화에 강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나타내는, 그래서 작가의 혼이 들어간 입체적인 창작을 하고 싶었던 조선 후기 예술가의 고민이 이렇게 선명하게 드러난 것은 아닐까요….

Prisca

미국 동부 메릴랜드에 거주. 글쓰기와 영화, 중국 무협 드라마 보기가 취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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