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나무를 뽑았다
금년에는 고추 모종과 함께 고추씨를 사다가 싹을 내 보기로 했다. 하지만 파종시기를 놓쳐서 6월에서야 모판 파종을 했다. 떡잎이 나올때 에는 모종으로 심은 텃밭 고추에는 이미 꽃이 피기 시작했다.
모판에서는 떡잎 두 개가 나온 상태로 성장이 멈춰 있었다. 할 수없이 수확이 되든지 안되든지 하는 맘으로 텃밭에 떡잎 두 개짜리 어린 고추 모종을 심었다.
마치 광야에 어린아이를 내다 놓은 심정이랄까?
햇빛이 쨍쨍 쬐이는 날에는 종이컵을 모종 위에 씌어 주고, 물을 주거나 비가 오는 날에는 종이컵을 젖혀 놓았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불면 종이 컵은 날아가고… 다시 제 자리에 씌워 놓는 일을 수도 없이 반복하였다.
어느 날 떡잎을 젖히고 가느다랗게 올라오는 본잎을 보고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몇 주 후에는 본잎이 무성하게 피어나고, 꽃이 피더니 작은 풋고추가 자라기 시작했다.
내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조금 늦긴 했지만 여름 내내 좋아하는 풋고추를 먹을 수 있었고, 삼 남매 가정과 친지들에게도 나눠 줄 수 있었다. 가을이 되자 간혹 붉은색 고추가 나타나기도 했다. 냉동해서 김치 담글 때마다 사용할 거라는 아내의 말에 이른 고추 밭, 늦은 고추밭을 번갈아 드나들며 열심히 거두어서 저장 하였다.
지금은 만추의 계절이다. 서리가 내렸다. 기온이 갑자기 영하로 내려갈 것 같아서 텃밭의 고추를 모두 뽑기로 했다. 뽑아보니 고추는 어느새 나무처럼 단단하게 자라 있었다. 영글지 못하고 남아있는 파란 고추는 소금물에 삭히고, 고춧잎은 반은 말리고 반은 삶아서 냉동실에 보관하기로 했다. 고추와 잎을 따낸 앙상한 뼈대만 남은 고추나무를 보니, 지난여름 고생하며 관리하던 그때의 어려움은 다 잊어 버리고, 잎사귀까지 나에게 남기고 간 고추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앙상한 뼈대도 내년을 위해 마당 한구석 두엄더미에 던져 놓았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이 나에게 다 내 주었던 고추나무를 생각하며 감사할 따름이다.
고춧잎을 햇볕에 말리며, 이제부터 겨울 동안 무말랭이와 함께 말린 고춧잎을 넣고 참기름을 흠뻑 넣어 만든 장아찌를 먹을 일을 기대해 본다. 무엇보다도 내가 싹내어 키우고, 비바람과 햇볕을 가려주고, 비료도 주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키워낼 고추나무를 나는 벌써부터 기다린다.